파랑
양산 본문
여름날 시장을 지나다 보면 좌판이나 과일가게의 참외나 복숭아 냄새가 나를 온통 싸안을 때가 있다. 날은 뜨겁고 날이 뜨거울수록 그 과일들의 냄새는 더 향그럽고 촉촉하고 서늘하다. 그러면 문득 떠오르는 어린 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 그리고 고향의 그 작은 거리들의 기억이 살아난다.
어린 날 어머니 손을 잡고 시내에 나갔던 날들이 떠오른다. 날은 뜨겁고 그러면 어머니는 한 손에 어김없이 양산을 펼쳐들었다. 한 손엔 양산을 들고, 한 손엔 어린 내 손을 잡고. 그 양산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참 예뻤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하얀 바탕에 꽃무늬가 살짝 어려 있었을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물방울 원피스를 입었던 게 기억나고 어머니 몸에서 나던 옅은 화장품 냄새가 잘 익은 과일 냄새처럼 내 몸을 싸안았다.
내 고향은 남원이다. 광한루 담장을 늘 보면서 살았다. 집 앞 고샅길을 나오면 2차선 신작로가 있었다. 아스팔트길은 한여름이면 발이 푹푹 빠졌다. 그 길을 따라 어머니 손을 잡고 시내에 나갔다. 조금 오르다 보면 광한루 담장 밑으로 뚫린 수로를 따라 콸콸콸 쏟아져내리는 냇물이 나왔다. 수양버들이 휘어져 늘어진 밑으로 그 냇물은 참 시원하게 흘러내렸고 어른 팔뚝보다 더 큰 잉어들도 이따금 떠내려왔다. 그 수양버들 밑에 구루마 위에 누워 낮잠을 자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매미 소리가 들렸던가. 그 잠은 참 달아 보였다. 역시 잘 익은 과일 냄새가 났던 것 같다.
길을 오르면 여러 가게들이 지나간다. 어머니와 내가 지나가는 게 아니라 그 가게들이 느린 기차들처럼 지나간다. 소리사, 가구점, 약국, 중국집, 양품점, 재봉틀집 등등. 젊은 어머니는 양품점 진열장 앞에서 잠시 머물렀을 것이다. 나는 그 옆 담벼락에 붙어 있는 무술영화 포스터를 호기심에 가득 차서 들여다보고. 그 옆 중국집에서 흘러나오는 짜장면 냄새. 흰 가운을 입고 흰 모자를 쓴 참 튼튼하게 생긴 아저씨가 흰 밀가루 반죽을 힘있게 아래 판에 내리치는 모습. 그 밀가루 덩이가 허공에서 고무줄처럼 늘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하다가 아래 판으로 떨어지는 모습. 라디오에선 아마 남진이나 나훈아나 하는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을 것이다. 또 그 작은 거리에 배경음처럼 깔려 있는 톱날 돌아가는 소리. 어디 근처에 제재소라도 있었을까. 그 톱날 돌아가는 윙윙하는 소리는 가끔 택시 한두 대 지나가는 그 거리의 정적이었다.
어머니와 시내에 나가는 일엔 두 가지 정도의 용무가 있었다. 병원에 가서 이를 뽑거나 엉덩이 주사를 맞거나. 아니면 새옷을 사 입거나. 그 두 가지 정도의 용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병원 앞에서 병원 냄새를 맡고 무서워 달아나려는 내 손을 잡고 어머니는 나를 어르고 달래며 끌고 들어가고 엉엉 울며 나오는 내 손을 잡고 옷집에 들어가 새옷을 사 입히고 오는 길에 아이스케키를 손에 쥐어주고 하는......
돌아오는 길은 다시 그 시골 소읍의 한가로운 풍경과 마주쳤다. 정적들. 한가롭게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 기름집 앞을 지날 때 그 고소한 기름 냄새. 다시 광한루 담장 밑에서 흘러오는 냇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 그때까지 그 아저씨들은 구루마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아, 매미 소리들. 매미 소리들이 이제서야 들려온다.
아직도 한여름 양산을 든 여자들은 예쁘다. 젊은 여자들부터 할머니들까지. 그 하얀 바탕을 분홍으로 살짝 물들인 꽃무늬들. 약간 탄 건강한 낯빛들. 그 여자들에게선 옛날 어머니에게서 맡아졌던 옅은 화장품 냄새가 나고 과일 좌판 앞을 지날 때 맡아지는 참외, 복숭아 들의 향긋한 냄새가 난다. 그리고 지금은 지나가버린 어느 소읍의 정적이, 그 한가로움이, 그 평화가, 매미 소리가 동시에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이다.
-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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