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스토리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하상욱 2020. 2. 22. 02:53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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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생애도 이처럼 흘러왔습니다.
게다가 한 노동자가 일을 마치고 강가에 나가 삽을 씻고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며 돌아보는 한 생애처럼 쓸쓸하고 쓰디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70년대에 씌어진 이 한 편의 시에 어린 수많은 공감의 정서가 시대가 달라진 지금 아직도 유효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아직도 우리 사회 밑바닥에는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뜨는 달과 같은 생들이 짓밟히며 이리저리 치이며 겨우겨우 숨소리 내고 살아가고 있는 때문이 아닐까요.
꼭 노숙자, 쪽방촌 이런 생들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어긋나면 아웃되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호칭만 사장님인 수많은 빈민 자영업자들 등등.
그리고 제법 풍족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당신에게까지도 이 노동자의 출렁이는 저문 강물이 당신의 가난했던 아버지를, 먼 친척 어른을 떠오르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다시 시를 찬찬히 더듬어 읽어봅니다.
화자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가난하지만 아직 어둡지만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고 그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 화자의 마지막 중얼거림이 얼마나 무겁고 뜨거운 울림을 주는지.
저문 강물에 맑게 씻긴 삽 한 자루를 떠올려봅니다.